욥기 머리말.
욥이 고난을 당했다.
그의 이름은 고난과 동의로 쓰인다.
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째서 접니까?"
그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그의 질문은 끈질기고 열정적이며 호소력 있었다.
그는 침묵을 답변으로 여기지 않았고, 상투적인 말들을 답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순순히 놓아드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묵묵히 감내하거나 경건하게 감수하지 않았다.
다른 의견을 구하러 의사나 철학자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하나님 앞에 버티고 서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또 항의했다.
"내가 오직 우너하는 것은 한가지 기도 응답뿐.
내 마지막 간구를 들어주시는 것.
하나님이 나를 밟아 주셨으면 벌레처럼 짓이겨 영원히 끝장내 주셨으면.
그러면 궁지에 몰린 나머지 한계선을 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나마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텐데.
내게 무슨 힘이 있어 희망을 붙들겠는가?
무슨 미래가 있어 계속 살아가겠는가?
내 심장은 강철로 만들어진 줄 아나?
내가 무쇠인간인가?
내가 자력으로 지금 상황을 이겨 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닐세.
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네!"
욥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가 고난을 당했을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영역인 가족과 건강과 물질적인 부분에서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고 담대하게 항의했다.
그는 자신의 질문을 가지고 "최고책임자"에게 나아간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다.
"억울한" 고난이다.
다들 어릴 때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아 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처벌이 우리의 잘못에 합당할 때 우리는 정당하다고 여기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의 크기가 우리가 겪는 고통의 강도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그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고서 매를 맞기도 하고,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고 나서 보상을 기대하며 손을 내밀었다가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쫓겨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더 나아가 분노하게 만드는 고난이다.
이런 고난이 욥에게 찾아와 그를 당혹스럽게 하고 분노하게 했다.
욥은 매사에 올바르게 처신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욥은 이 고난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항의했다.
욥의 항변은 조리 있고 정곡을 찌르며 정직하다.
따라서 고난을 당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욥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고통을 들을 수 있다.
욥은 소심한 사람들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내용들을 담대하게 말한다.
사람들의 내면에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는 흐느낌을 시로 표현해 낸다.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만 웅얼거리는 불평을 그는 하나님께 토해 낸다.
그는 좌절에 빠진 희생자이기를 거부한다.
"나는 아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그분은 나를 되살려 주시는 분.
그분이 마침내 땅에 우뚝 서실 것이네.
나 비록 하나님께 호된 벌을 받았지만 그 분을 뵐것이네!
내 두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뵐 것이야.
오, 어서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욥이 하지 않는 행동도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가 의도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서 찾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다.
하나님을 부인함으로써 고난의 문제 자체를 없애버리라고 제안한 셈이다.
하지만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고난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주지도 않는다.
고난은 신비다.
욥은 그 신비를 존중하게 된다.
"그 분은 내가 어디에 있으며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신다네.
그분이 아무리 철저히 나를 시험하셔도, 나는 영예롭게 그 시험에 합격할 걸세.
나는 가까이에서 그 분을 따랐고 그분의 발자취를 쫓았네.
한번도 그 분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네.
나는 그분의 말씀을 모두 지켰고 그분의 조언을 따랐으며 그것을 소중히 간직했네.
그러나 그분은 절대 주권자시니 누가 그분께 따질 수 있겠는가?
원하는 일을 원하실 때 행하시는 분이 아닌가.
그분은 나에 대해 정하신 일을 빠짐없이 이루실 것이고 그 외에도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네.
그러니 그분 뵙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생각만 해도 두려워지는구나."
고난에 직면하여 의문을 제기하다 고난을 존중하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욥은 자신이 더 큰 신비, 곧 하나님의 신비 안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고난의 가장 큰 신비는, 고난에 처한 사람이 넘치는 경이감과 사랑과 찬양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을 예배하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고난이 매번 그런 결과를 낳지는 않지만, 그런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욥의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그가 빈정대는 아내에게 한말에도 심오한 역설과 받아들이기 어려운 우울한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좋은 날도 받았는데, 나쁜 날도 받는게 당연하지 않소?"
그러나 욥기에는 욥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욥의 친구들이 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친구가 죽어 상심하거나, 일자리를 잃거나,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거나, 우울증에 빠지거나,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거나, 종류를 막론하고 곤경에 처하는 순간, 사람들이 다가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나아질 수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주검에 독수리가 모이듯 고난당하는 사람들 주위에는 해결사들이 모여든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신경 써 주는 그들이 그저 고맙고 어쩌면 그렇게 멋진 말들을 척척 내놓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은 정말 아는 게 많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생활의 전문가'가 되었을까?
그런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지만 어딘가 어설프다.
그럴듯한 영적 진단과 처방을 잔뜩 내놓는데, 그것을 듣고 난 다음에는 "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왜 저들의 말을 듣고 나면 기분이 나빠지는 거지?"하는 의문이 든다.
욥기는 고난의 위엄과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함께하심을 알리는 증언인 동시에, 해명이나 "답변"정도로 축소된 종교에 맞서 성경이 제시하는 주된 반론이다.
친구라는 사람들이 욥에게 내놓은 많은 답변이 형식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바로 그 "형식적인"측면 때문에 그들의 답변은 쓸모가 없어졌다.
그것은 인격적 관계가 없는 단변, 교감없는 지성이다.
욥의 친구들은 표본병에 라벨을 붙이듯 황폐해진 욥의 인생에 답변을 붙였다.
욥은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의 세속화된 지혜에 몹시 화를 낸다.
"자네들 말은 이제 물릴 만큼 들었네.
그것도 위로라고 하는건가?
그 장황한 연설은 끝도 없는가?
무슨 문제가 있기에 그렇게 계속 지껄이는가?
자네들이 내 처지라면 나도 자네들처럼 말할 수 있겠지.
끔찍한 장광설을 그러모아 지겹도록 들려줄 수 있을 걸세.
하지만 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격려하고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말을 할 걸세.
복장 터지게 하는 말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건강, 부, 지혜"를 보장하는 생활방식을 가르쳐 주겠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고난을 막아 준다고 선전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꼭 필요한 지적, 도덕적 답변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그들을 곁에 둔 우리는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 앞에 나타나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행동하기만 하면 만사가 잘될 것이라고 말하는 친절한 사람들의 진부한 말을 믿고 엉뚱한 길로 내달렸던 경험이 다들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이런 우리를 대신해서 욥은 번민에 찬 답변을 내놓는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투의 조언과 모든 상황을 그럴듯하게 설명해 내는 가르침을 거부한다.
욥의 정직한 항변은 정황한 종교적 잡설과 긍정적 사고를 주창하는 자들의 판에 박힌 말을 반박할 최고의 답변이며, 이 사실은 지금도 유효하다.
욥은 정직하고 무죄한 사람이었지만 엄청난 고난을 당했다.
그리고 당대의 종교적 상식으로 무장한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가 일장연설을 쏟아내며 그를 포위했다.
욥과 친구들의 모습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친구들은 상담가 역할을 자처하며 책에서 배운 교훈들을 현학적으로 논리정연하게 제시한다.
처음에 욥은 고통 고통에 겨워 분통을 터뜨리며 큰소리로 항변하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폭풍 가운데 말씀하시자 그 "회오리바람"같은 신성 앞에서 경외감에 사로잡혀 믿음을 되찾고 입을 다문다.
진정한 믿음은 영적인 상투 문구로 축소되거나 성공담의 소재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믿음은 고통의 불길과 폭풍 속에서 다듬어진다.
욥기는 일체의 답변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신앙에는 충분한 답변이 있다.
욥기가 거부하는 것은 세속화된 답변이다.
우리를 치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참된 해답의 원천이신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분리되어 세속화된 답변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서 끊어진 상태로는 그분에 대한 진리를 보유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에게는 연민의 마음이 있어서 사람들이 고난받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고통을 막거나 덜어 주려 한다.
이것은 분명 좋은 충동이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자 한다면, 욥의 친구들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에게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거나 문제를 없애거나 상황을 "더 좋게" 만들 능력이 있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가지고 "도움"을 베풀어서는 안된다.
고난당하는 친구들을 보면 어떻게 하면 부부관계가 나아지고, 아이들의 행실이 좋아지고, 마음과 정서가 건강해지는지 가르쳐 주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고난을 해결하려 달려들기 전에 몇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첫째, 우리가 제아무리 통찰력을 가졌다 해도, 친구들이 겪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둘째, 친구들이 우리의 조언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얄궃은 일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고 해도 고난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더 많은 고난을 받는다.
이들은 고난을 통해서 그 전에는 생각조차 못했을 놀라운 방법으로 삶이 변하고 깊어지며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고난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별 성과도 없는 일에 집중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고난 속으로 들어가 그 고난과 함께 해야 한다.
고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고난받는 사람들이 안됐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서 배우며, 그들이 허락하는 선에서 함께 함께 항변하고 기도해야 한다.
동정은 근시안적이고 주제넘은 일이 될 수 있다.
고통을 나누는 일은 사람을 존중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변화시키는 일이다.
욥의 고난과 기도와 예배를 바라보면, 우리가 따라가야 할 용기와 고결함의 길을 그가 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나 혼자만 고난받는 것 같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욥이 앞서 간 길을 뒤따르는 일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캄캄한 순간에는 폭풍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하나님께 환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으실지라도, 그 분은 욥에게 설명하신 수 많은 방법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신다.
그것은 거시세계에서 미시세계까지, 경이로운 은하계에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아주 작은 것들까지 포괄한다.
그분은 우리 앞에 펼쳐진 측량할 수 없는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 안에 있는 소우주의 창조자도 되신다.
하나님께서 사나운 폭풍의 눈에서 욥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땅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아는 것이 그렇게 많다니, 어디 말해보아라!
너는 아침에게 '기상'명령을 내리고 새벽에게 '작업 개시'를 지시한 적이 있느냐?
그리하여 땅을 이불처럼 거머쥐고 바퀴벌레를 털어 내듯 악한 자들을 털어버린 적이 있느냐?
너는 구름의 주의를 끌어 소나기를 내리게 할 수 있느냐?
번개를 뜻대로 부리고 명령을 바로 수행했는지 보고할게 할 수 있느냐?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품는다.
그 희망은 캄캄한 고난에서 피어나는 것도, 책에 담긴 듣기 좋은 답변들이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고난을 살피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희망이다.
기도하고 묵상하며 욥기를 읽노라면, 인생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떠오르는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욥기의 대답들이 모두 진부하게만 들린다.
그러다 똑같은 질문들을 조금 다르게 다시 묻게 되고 똑같은 대답들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우리가 욥의 입을 통해 올바른 질문을 던지게 되면, 비로소 우리 고난의 가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음성과 신비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게 된다.
우리를 보고 우리의 말을 들으면서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응급처치식 조언을 욥과 함께 거부할 때, 우리는 폭풍 가운데서만 찾아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마음을 열고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의 어둠과 고투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 신비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난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해 따져 묻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성찰 하는 자리임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면 입장이 뒤바뀐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고난과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통해 욥의 경험과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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